No.02
검은 모래 해변
leejamongsu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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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잠시 새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공에게는 희망이나 기쁨이라는 게 있다
날개뼈가 너무 아픈 날에는 말이야
오전이 다 가도록
이불 속에 숨어 케겔 운동을 한다
커튼 사이로 흐르는 빛과 다 식은 커피
살며시 뜯으면 떨어질 듯한 숨으로 깨어나 누나는 말한다
병아리가 낯선 공간에 배치된다면
열흘이 지나기 전에 생사의 여부를 알게 될 거라고
누나는 방금까지 나흗날의 눈을 보았다고 했다
심장을 바깥에 꺼내 식혔다고 했다
물속에서 끓는 감자들과
프라이팬에서 볶은 아스파라거스
문고리를 돌리듯 목을
둥글게 돌리고
앞에 앉아 우리 식탁 앞에서는 복스럽게 웃자
식탁보가 허튼수작 부리지 못하게
나이프가 무딘 목소리로 우리를 비웃지 못하게
누나는 태명도 태몽도
레몬이다
누나가 인쇄공이 된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
비전이 없다 한들
종목이야 바꾸면 되는 거고 설마 휴지 없는 세상이 오겠어요
출근을 열심히 합시다 나는 누나가 젖은 종이 냄새 데리고 올 때를 좋아했다
누나는 재생 용지가 좋다고 했다
재생 용지… 웬만한 종이…
펄프 제조기에서 화학약품과 폐지가 돌아간다 지점토 모양을 한다
얇게 펴진 페인트 모양을 한다 폐지는 열심히 새 폐지가 된다
다 갈려버린 역사 위에 활자를 두는 것
우리는 이걸 신문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공간까지 갔다가
예상치도 못한 시간에 되돌아오기까지도
신문이라 불렀습니다
누나는 미지에서 결백하므로 정말이지 탁월하다
탁월하니까 무릎이 자꾸만 간지럽다
레몬은 지문이 없다
웬만한 종이들이 지문을 훔쳐 갔다
반들반들한 손바닥을 쥐면 반들반들한 주먹
내일은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
레버를 밀면 작동되는 기계 매머드의 직관적인
울음
충돌
회색빛
노랑이 기계를 유연하게 쓰담아준다
노랑은 그러나 하나의 부품처럼 행동한다
입자가 무겁고 불균일한 탓에
노랑은 물감 중에서도 유독 잘 뭉치는 성질입니다
어깨 좀 주물러줘
허리도 주물러줘
누나는 모르지만
누나의 흰 발이 이불에서 삐져나올 때 누나는 꿈을 꾼다 처음 보는 아이가 방으로 들어와 발밑에서 표정을 감추고 흐느끼는 꿈 그 기분이 오묘해서 누나는 훼손이 잘 된 악몽이라 불렀다
검은 머리 짐승
leejamongsupark
나는 지금 감당하지 못할 속력입니다 죽여 버리고 싶다 생각한 사람과 키스를 했고 토요일입니다 점심으로 낫토를 먹으며 누에고치를 떠올렸습니다 포만감이 들지 않아 과식을 합니다 나와 키스를 한 사람이 내가 터지지 않을 만큼의 힘으로 안아줍니다 나는 그때도 그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나를 자꾸 눕혀줍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속력이라는 걸 안다는 듯 고개 끄덕입니다 우울증 걸린 앵무새를 아냐고 물어봅니다 부리로 털을 뽑던 앵무새가 새 주인을 만나 춤을 배우고 건강을 되찾는 이야기 나는 모른다 했습니다 나는 늘 앵무새가 얼마큼 털을 뽑았는지가 중요했고 그는 춤에 대해서만 말했습니다 이를테면 캉캉 혹은 탱고를 나를 눕혀준 사람이 내가 춤에 관심이 없자 서럽게 울었습니다 아주 서럽게 울었습니다 나는 그러므로 화장실에서 털을 전부 밀었습니다 털이 하수구에 수북해지며 검은 머리 짐승, 머리 짐승, 짐승이 되었습니다. 멍든 무릎이 드러나자 아주 서럽게 울던 사람은 내 무릎을 아까워합니다 나는 괜찮아 만약 심장이 서로 달라붙어 잠에 드는 자세가 된다면 그것도 춤이 될까
내 무릎을 아까워하는 그가 말합니다 이 집에서 그대로 깨어나면
알게 되겠지
누나는 제주도를 사랑합니다
누나는 감귤을 사랑합니다
누나는 보통 이불 속에서 제주도의 날씨를 찾아본다던가 바다를 떠올리며 제주도를 만들어냅니다
발이 춥다 오늘 나는 태풍 부는 제주도 시월이다
항구에 배가 정착한 채 요동치는 풍경이다
이불 속 누나는 동그랗고
누나는 지각 한번 한 적 없는 근면 성실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성실함을 누나한테 배웠습니다
신발 꺾어 신는 스타일도 배웠습니다
출근길에 엇박 타는 걸음을 보면 반갑게 인사해 주세요
삼 년 전이었을 거야
미술관 다녀오는 길에 언덕에서 굴러 넘어졌잖아
나 말고 누나
보이지 않는 곳에 힘 주기
이런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궁금했지
머리카락으로 붓을 만들었다는 과정은 참 놀라워
누나가 구르느라 물어보지 못했는데
늦가을이 아니라 초봄이었어
정말 죽은 자가
흘리는 눈물을 본 적 있어?
레이캬비크 근처에서
케겔 운동을 한다
1970년대 신문지 한 페이지가 군고구마를 감싸고 있다 두 겹의 껍질은 답답하군요
날개뼈가 너무 아픈 날에는 말이야
다른 꿈에서 누군가 나를 꽉 안아준 게 분명해
누나의 태명은
레몬
누나의 태몽은 레몬
맑은 날씨
계단이 계단을 만들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주인집 할머니가 레몬 나무를 들고 왔다 양재 꽃시장에서 사 왔다고
레몬 꽃은 언제 개화해요
이토록 좁은 마당에서 레몬 나무가 자랄 수 있을까요
검은 종이 출력된다
기계가 굉음을 내며 속도를 낸다 인쇄공이 눈치채지 못한 삼 분간 기계는 검은 종이를 뱉어내고
인쇄공들은 더 빠른 속도로 밥알을 삼키고
기계는 뜨거움의 미학을 안다
기계(매머드)는 기계(매머드)로부터 완벽히 벗어난다
한 인쇄공이 급히 레버를 당기지만
여긴 이제 어떤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검을 현 검을 현
검을 현
깨끗하군요 진심입니다 누를 황 말한다
나는 그저 축축한 밭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새끼
고구마이고 싶었어
하물며 땅의 흔들림을 담담한 귓속말로 느끼고 싶었어
누나는 검은 침으로 뒤덮여 있다
인쇄소는 점점 비좁아진다 꿈만 같아
꿈이 아닌데도
혈액순환이 좋은 자들은 평소 행실이 올곧아 어진 품성을 지녔다는 근거이며, 그렇지 않은 자들은 수족냉증이 심해 다라이에 더운물 받아 손과 발을 녹이는 벌을 달게 받게 되느니라
검은 옷 입은 사제들이 행렬을 이루며 걸어간다
붉은빛 띠는 구름이 흩어져 사라져 간다
축하해 열흘을 지났어
날개뼈가 정말 아픈 날에는 있잖아
나 좀 잡아줘
누나가 달린다
보폭이 넓어진다
인파 속에서 사라진다
우린 서로의 잠꼬대를 알려준 적 없다
아무래도 말해야겠어요 휴지마저 사라진다면 모두가 다 갈려버린 역사 위에 코를 힘껏 풀 거라고요
맨발로 달린다
저 멀리 보이는
반들반들한 빛
처음 보는 집
연탄재 두 개
십시 일분